<아무튼, 외국어>, 조지영
글 작성자: _J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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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외국어, 조지영
★★★◐☆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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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가볍게 읽히는 책이었다. "문학청년의 꿈을 품고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재능과 노력 어느 요건도 충족하지 못해 졸업 이후 일찌감치 전공과 무관한 직업을 택하여 오늘도 출퇴근에 매진하고 있다." 라는 저자의 소개가 마음에 들어 읽기 시작했다. 어문학도들은 모두들 한마음인가 보다.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서 피식 피식 웃으며 읽었다.
저자가 궁금해서 인터넷에 정보를 검색해 봤지만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냥 글 좀 쓰는 회사원인걸까. 책은 정말 가벼운 에세이다. 저자가 불어를 전공한 이야기, 중국어, 독일어, 일본어를 배워보겠다고 잠깐 외국어에 발을 담가 본 이야기일 뿐인데, 이런 내용으로 어떻게 책 한권을 쓸 수 있는지가 참 놀라웠다. 게다가 글을 참 잘 쓴다고 느꼈다. 문장들이 제법 위트있고 공감이 가는 표현과 비유들이 많아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저자가 부럽기도 했다.
글에서 풍기는 느낌 때문에 젊은 사람이 쓴 글일거라고 예단했다. 하지만 글에 나오는 영화나 글쓴이의 학창시절 이야기가 어쩐지 올드하다 싶더니 저자는 이미 40대였다..! 그 점도 놀라웠지만, 이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문과 학생들의 고민과 비애는 한결 같구나 싶었다.
글 속에 영화와 음악이 참 많이 나온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표현도 있지만 글쓴이의 취향이 꽤 나와 잘 맞았기에 나는 매우 공감하면서 봤다.
사실 전공은 노어지만 내가 가장 관심이 있는 언어는 일본어다. 초등학생 때부터 나름 일드와 애니로 기본 인사말과 단어들을 터득했다. 고등학생 때 일본어는 제2외국어로서 유일하게 내가 매번 전교 석차 1등을 찍은 과목이었으며 일본어 동아리에도 들어 활약을 하기도 했었다. 일본어 선생님도 나한테 대학가면 좀 더 공부해서 JLPT 같은 시험도 봐 보라고 했었는데, 막상 대학을 가니 영어도 못하고 노어도 못하는데 무슨 일본어 공부냐고 생각했다. 공부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취미가 3개월 동안 이런 저런 외국어를 배워보는 것인 저자를 보니 다시 일본어를 배워볼까 하는 용기가 생기는 것도 같다.
나는 아직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이기에 늦었다는 표현을 하면 좀 건방져 보일 수 있으나 나도 갓 입학했던 새내기였을 때 러시아어를 좀 제대로 파볼걸, 이라는 후회를 한다. 저자의 말처럼 나도 문득 어디선가 노어가 들리거나 어디엔가 노어가 적혀있는 것을 보고 오감이 집중되는 걸 보면, 전공을 싫어하는 게 아닌건 분명하다. 떠나지 않고, 떠난 척해보고 싶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도 같다는 저자처럼 외국어에 대한 내 마음은 언제나 짝사랑에 그치고 만다는 게 문제지만.
기록
문학청년의 꿈을 품고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재능과 노력 어느 요건도 충족하지 못해 졸업 이후 일찌감치 전공과 무관한 직업을 택하여 오늘도 출퇴근에 매진하고 있다.
혹시라도 외국어를 단기에 마스터하는 방법 같은 것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라면, 여기서 책을 덮으시는 편이 훨씬, 현명할 것이라 덧붙인다. 그런 방법 같은 것을 알았다면, 정말… 정말 좋았을 텐데.
외국어의 평화를 잠식하는 것은 대체로 동사라는 막강한 빌런의 공이 크다. 마치 공부를 잘해도 수학을 못하면 크게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언어를 잘한다는 것은 동사를 잘 구사한다는 뜻과 많이 다르지 않다.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수학했고, 후일 러시아어 통역을 오래 했던 일본의 에세이스트 요네하라 마리는, 열네 살에 일본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열등감’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감정이 무엇인지도 몰랐다고 생전에 술회했다. 심지어 체코에서는 ‘어깨 결림’이라는 말도 들은 적이 없으니, 말이 없으면 신체 감각도 없게 마련이라고 했다(체코에 가고 싶다).
모든 언어는 그 언어가 그 언어일 수밖에 없는 개성과 그 개성이라는 예쁜 말 뒤로 어마어마한 협곡이 있다. 협곡을 건넌 사람과 건너기 전에 멈춘 사람, 협곡에 빠진 사람으로 나눈다면 나는 대체로 협곡이 보일 즈음에 멈췄거나, 빠졌다가 겨우 나와서 가던 길 안 가고 반대로 돌아왔던 것 같다.
외국 문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텍스트와의, 저자와의, 또 나와의 싸움인지를 어렴풋이 눈치채자마자 바로 연애와 동아리 활동에 매진했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로망이었던 불어불문학은 그저 ‘학점 따기 어려운 과목’으로 변해갔다.
대학 시절은 빠르게 지나갔고, 불어는 어려웠고, 취직은 더 어려웠다.
그러다가도 문득 어디선가 불어가 들리거나, 어딘가에 불어가 적혀 있거나 하면 어쩐지 오감이 집중된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저 말이 불어인 것은 알겠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 순간이다.
그럴 때마다 드는 아쉬운 감정은 이 쓸모도 없는 전공을 왜 했을까보다는 학교 다닐 때 불어 좀 열심히 할걸, 이라는 후회에 가깝다. 인과관계가 종종 혼동되지만, 열심히 안 했고, 그러다 보니 잘 못해서, 그나마도 다 까먹어서 아쉬울 뿐이지, 나는 이 전공을 후회한 적이 없다. 대체적으로 한심하고 일반적으로 잘 안 풀리는 이 삶의 이유는 나 때문이지, 나의 전공 때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강독 수업은 마치 콜드 콜(cold call)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교수님에게 호명된 학생은 원서의 단락을 읽고 해석한다. 그러면 그 옆에, 혹은 그 뒤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로 순서가 이동되는 식이다. 단어를 모르면 해석을 할 수 없으므로(실은 단어를 알아도 해석이 쉽지 않았다) 모르는 단어 없이 수업에 들어와야 했다. 즉, 예습 없이는 수업이 없다고 해야 하겠다. 최소한 단어의 뜻이라도 미리 적어놓지 않고 수업에 들어갔다가 콜드 콜에 걸리는 날에는 꽤 오랫동안 동기들에게 위로를 받아야 할 만큼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
그런 일상의 틈새로 불현듯 마들렌 쿠키가 출몰할 때면, ‘아, 내가 그래도 불문과를 나왔는데…’ 하는 뜻 모를 상념에 젖곤 한다.
독일어는 예외가 많지 않다고 한다. 대신 규칙이 너무 많다고 알려져 있다. 무리해서라도 많은 규칙 속에, 가능한 한 모호함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언어다. 단어들, 문장들 속에서 결코 길을 잃지 않겠다는 결기가, 언어에서도 전해지는 것 같다.
어쩐지 일본어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그냥 두고(?) 있는데, 마치 ‘우리 애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금방 성적이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공부 못하는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이 혹시 이런 건가, 싶다.
영어는 그래도 문제집 한 번 미리 보고 가면 버틸 만해서 일주일에 두어 번은 술 마시러 안 가고 과외 학생 집으로 총총 열심히 달려갔다.
잡기는커녕 손에 제대로 닿은 적도 없으나 영어를 이미 잡은 언어 취급하면서 그럼 다른 언어를 만나볼까 하며 이 언어 저 언어 기웃거리고 다녔다.
떠나지 않고, 떠난 척해보고 싶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도 같다.
남의 책을 읽는 데 시간을 보내라. 남이 고생한 것에 의해 쉽게 자기를 개선할 수 있다 - 소크라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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