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네하라 마리 (米原万里)
나는 할머니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할머니만 보면 자꾸 그때는 어땠어요? 그때는요? 하는 질문이 입을 간지럽힌다. 귀에 딱지 앉게 들었다며 했던 얘기 또 한다고 투덜거리는 엄마와 이모들과 달리, 매번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경청하며 맞장구를 쳐주니 할머니도 내게 옛날이야기를 해 주는 게 마냥 귀찮지만은 않으셨던 것 같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영화에서나 볼 법한 스펙터클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유년시절, 처녀 때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면 내가 그 시절을 살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할머니는 정말 담담하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줬지만, 그 시절의 할머니에게 감정 이입해 오히려 내가 눈물을 보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산당의 기역 자도 모르지만 동네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몇 안 되는 청년이라는 이유만으로 끌려가 억울한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할머니의 큰 오빠 이야기, 식모살이를 하더라도 상경하고 싶어, 서울 양반 댁으로 식모살이를 가게 된 친구를 그토록 동경했던 이야기, 일곱 자매를 키우며 농사일이 버거웠을 때 찾아온 천애고아 같아 보이던 사내놈을 머슴으로 들여 농사일을 시키면서 글까지 가르쳐 주었던 이야기는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할머니의 고전 레퍼토리이다.
누군가 내게 인생 책이 무어냐 물었을 때, 거침없이 답할 수 있는 책이 있다. 박완서 작가의 '그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나는 이 책들을 한 권으로 본다), 박완서 작가의 또 다른 책인 '노란 집', 그리고 요네하라 마리 작가의 '프라하의 소녀시대'이다. 마찬가지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묻는대도 나는 항상 이 두 작가를 꼽는다. 이 둘의 공통점은 오롯이 본인만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썼다는 것이다. 이들의 책을 읽을 때면 마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마음이 괜스레 따뜻해지고 몽글몽글해지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그런 기분이 들어서, 그게 이들의 책이 내 인생 책이 된 이유였다.
남들에게 내가 아는 것들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소개하고 전하는 일이 나는 너무도 즐겁다. 이렇게 좋은 걸 나만 알 수는 없지. 그러니 남들도 내가 느꼈던 그런 감정과 기분을 느꼈으면 했다. 오늘도 과 동기를 만나서 요네하라 마리 작가를 영업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함께 광화문 교보를 들러 친구가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구매해 갔는데 그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런 걸 보면 내 천성은 영업인 건가.
요네하라 마리 작가와 나의 유일한 접점은 국내에서 제일가는 외국어 대학교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러시아라는 나라가 낯선 것은 물론이고, 외국어 실력은 요네하라 마리의 발톱의 때만큼도 못 따라가지만 그래도 그런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작가와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곤 해 요네하라의 책을 읽을 때면 멋있는 과 선배 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래서 항상 이 작가의 책만큼은 우리 과 친구들이 꼭 한번 읽어봤으면 했다. 무엇보다도 교수님들은 알려주지 않는 러시아에서의 재밌는 유래나 썰을 들려준다. 러시아 공책이 정사각형인 이유를, 100년 전 러시아인들은 팬티도 잘 입고 다니지 않았음을 그녀의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또 물론 깊이가 있지는 않지만 본인과 주변사람들의 경험이 생생히 녹아있어 러시아 역사를 그린 그 어떤 역사책 보다도 흥미롭다. 책에 언급된 역사적 사건이 흥미로워서 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자발적으로 찾아보게 된다면 그것 또한 일종의 역사서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요네하라 마리의 일대기를 짧게 정리한 일본의 한 유튜브 동영상이다. 문필가로서가 아닌 통역가로서의 그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정말 멋있다...! 옐친 대통령과 다정하게 볼인사를 하는 모습이라니...
나는 이토록 좋아하는 작가이지만, 지금은 국내에서 그녀의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요네하라의 대부분의 책이 절판인 것도 그렇고, 비교적 최근에 다시 나온 문고본들도 대부분의 서점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신간이 아니라 그런 건가... 그래도 어딘가에 분명히 나 같은 요네하라 마리 글의 매니아가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중고서점에만 가면 눈에 불을 켜고 요네하라 마리의 절판된 도서를 찾곤 한다. 마치 보물찾기 같은 일이라 그렇게 발견한 그녀의 책들은 더 값지고 소중하다. 요네하라의 독특한 성장배경도, 사건과 사물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남다른 통찰력도, 넓고 깊은 교양 수준도 모두 나를 사로잡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을 스토리로 위트 있게 물 흐르듯 풀어내는 그녀의 능력이 정말 엄청났다. 언젠가 내 이야기를 책으로 엮게 된다면 나도 요네하라 마리처럼 그렇게 다감하면서도 재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일기가 너무 길어졌으니 오늘은 블로그에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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