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21 잠
글 작성자: _J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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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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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잠을 일부러 자지 않으려 할 때가 있었다. 잠을 안 자도 그 때만은 의식이 또렷했다. 밤새도록 카톡을 해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고, 밤새도록 책을 읽어도 말짱했다. 잠을 자는 시간이 24시간 중 3분의 1이라니 이 얼마나 아까운 시간인가. 남들이 다 자고 있는 그 시간에 누군가와 은밀히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 무언가 생산적인 활동을 행한다는 것이 되려 내게 벅찬 느낌을 주었다. 심지어는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도 어떤 활동을 하고 그 기억을 가져가기 위해 루시드드림을 연습했으니 말 다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오히려 하루에 5~6시간은 무조건 자려고 부단히도 노력한다. 잠이 없는 세상, '쿨다운하기 위한 치유행위'가 없다는건 상상도 하기 싫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생각해 보면,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잠을 줄인다는건 그만큼 깨어있는 동안의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말이니까.
주인공처럼 잠을 자는 그 시간을 누구에게 방해받지 않고 사용하며 내 시간을 확장해 남들이 갖지 못하는 그 시간을 갖는다는 것, 그 쾌감은 꽤나 황홀할 것 같다.
주어질 수 없는 축복을 누린 후에는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이 교훈인걸까.
마지막에 주인공은 괴한들이 자동차를 흔들고 엎으려는 차 안에 꼼짝없이 갇혀 눈물을 흘린다.
열린 결말이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거라 생각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결말은
주인공은 그저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한낱 백일몽에 불과한 꿈을.
꿈 속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니까 17일 동안의 초현실적인 일들은 어느정도 납득된다.
주인공은 그저 꿈 속에서 일탈을 즐겼던 것이다.
단조롭기 짝이없던 일상에서 소비되는 가정주부로써의 자신이 아닌
초콜릿을 먹으며 책 읽기를 좋아하던 본연의 '나'다운 모습으로.
그러나 꿈은 꿈일 뿐,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두 명의 괴한은 남편과 자신의 아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자고 있는 엄마와 아내를 흔들어 깨우는 평범한 행동이었겠지만,
혼자만의 세계에 심취해 있던 주인공의 꿈에서 이상하게 생겨먹은 남편과 그를 꼭 닮은 아이는
그녀의 차를 뒤엎으려는 못된 괴한일 뿐이다.
그렇게 일상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사실을 깨달은
주인공은 그저 우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나를 끌어당기는 것은 19세기 러시아의 두툼한 소설이었다. 얼마든지 계속 읽을 수 있었다. 아무리 의식을 집중해도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 나도 좀 톨스토이의 소설을 그렇게 읽어보고 싶다.부럽다.
안나까레니나를 읽어보고싶다.
좋은 문장
'하루하루가 거의 똑같은 일의 되풀이였다. 나는 간단하게 일기 같은 것을 쓰고 있지만 이삼 일 깜빡 잊고 쓰지 않으면 어느 날이 어느 날인지 벌써 구별하지 못한다. 어제와 그제가 뒤바뀌어도 거기에는 아무 지장도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인생인가. 때때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허망함을 느낀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냥 단순히 깜짝 놀랄 뿐이다. 어제와 그제의 구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런 인생에 나 자신이 끼워 맞춰져버렸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찍은 발자취가 그것을 인정할 틈도 없이 깜짝할 사이에 바람에 날려가버린다는 사실에.'
' 옛날과 똑같이 초콜릿을 먹으면서 <안나 카레리나>를 읽고 싶었다. 온몸의 세포가 초콜릿을 원하며 숨을 죽이고 바짝 오그라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 그렇게 해서 나는 잠을 못 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일은 없다. 요컨대 나는 인생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밤 열 시부터 아침 여섯 시까지의 시간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루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그 시간은 지금까지 잠이라는 작업에 - '쿨다운하기 위한 치유행위' 라고 그들은 말한다 - 소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나만의 것이 되었다. 다른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다. 내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을 나 좋을 대로 쓸 수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으면서.'
'적어도 지금 나는 나 자신의 인생을 확장하고 있다. 이건 매우 멋진 일이다. 거기에는 나 자신이 지금 이곳에 살아 있다는 실감이 있다. 나는 소비되고 있지 않다. 적어도 소비되지 않는 부분의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나를 끌어당기는 것은 19세기 러시아의 두툼한 소설이었다. 얼마든지 계속 읽을 수 있었다. 아무리 의식을 집중해도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난해한 부분도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바늘이 레코드의 홈을 더듬는 것처럼 내 손가락은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을 생생하게 더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깊고 격렬하게 감동도 했다. 이것이 본래의 바람직한 내 모습,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기타
교보문고에서 하루키의 버스데이걸을 읽으려다 밀봉돼 있어 할 수 없이 펼쳐들었던 책.
다 못 읽어 학교에서 대출해 집에서 읽음.
카트 멘쉬크의 일러스트
남의 책을 읽는 데 시간을 보내라. 남이 고생한 것에 의해 쉽게 자기를 개선할 수 있다 - 소크라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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