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좋아요, 취소
좋아요, 취소 (2013.11월)
SNS는 세대의 흐름이다. 우리 생활과 업무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스마트폰, 이젠 밥 한끼 안 먹는 것보다 스마트폰 없는 반나절이 더 견디기 힘들다. SNS는 이런 스마트폰을 더욱 빛나게 한다. 지하철을 타도, 카페를 가도, 집 앞의 거리를 나와봐도, 남녀노소를 불문한 사람들이 죄다 고개를 사십오도 정도 숙인 채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는 저마다의 SNS를 확인하고 있다. 그것은 정보의 작은 바다다. 인터넷이 정보의 태평양이라면, SNS는 작은 동해바다랄까. 그곳에서는 언론에서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 정치의 뒷이야기들과 사회적 이슈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펼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포함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 알고 싶은 사람, 그리고 평소 동경하던 사람들의 견해와 사생활까지도 속속들이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장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런 매력적인 점 때문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자신만의 또 다른 공간을 마련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 많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그것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몇 달 전 SNS라 불리는 많은 것들 중에서도 페이스북이란 것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스마트폰을 쓰고 있긴 했지만,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그것을 스마트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용하는 것이라곤 전화, 문자, 카카오톡 정도. 왜 좋은 기계를 두고 쓰지를 못하냐는 회사 여직원의 말에 왠지 모를 자존심이 상해 상당수의 사람들이 하고 있는 SNS라며 직장 동료에게 추천받은 페이스북 어플을 깔았다. 처음에는 페이스북 내의 친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전화번호부에 저장되어있는 그나마 가까운 사람 서른 명 남짓 정도였을까. 하지만 곧 어떻게 알았는지 일가 친척들, 예전 직장 동료, 서로 바쁜 일상 탓에 뜸해진 중고등학교 동창들과 대학동기들이 나에게 친구신청을 걸어왔고, 나는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300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과 친구를 맺었다. 처음이 어려웠지 몇 번 들어가 사용법을 익히고 나니 이거 완전 식은 죽 먹기였다. 친구를 맺은 사람들의 생활을 스마트폰 너머로 엿보기도 하고 나의 사소한 이야기와 감정을 업데이트하며 댓글로 그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꽤 재미있던 지라 심심할 때 마다, 아니 굳이 심심하지 않아도 습관처럼 새로운 소식이 없나하고 페이스북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젠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지면 페이스북을 살피는 것이 버릇이 되어, 화장실에 갈 때조차도 스마트폰을 휴지마냥 챙겨 들어가게 되었다.
화장실에 다녀와 보니, 가기 전 타놓고 간 커피는 진즉에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커피의 온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 모금 마시고 머그잔을 손에 쥐고는 손잡이 부분을 요술램프 문지르듯이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머그잔은 고양이새끼 울음소리 같은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나는 머그잔을 식탁위에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으러 방에 들어갔다. 가죽소파에 담근 몸이 나른해 졌다. 책장 위에 놓여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때 찍은 사진인 듯하다. 저런 사진이 집에 있었나. 마음을 비우고 가만히 앉아있으니 평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아, 평화롭다. 평일에는 바쁜 업무로 끊이지 않는 야근 때문에 좀처럼 이런 여유를 가지기 힘들다. 어딘가에 엉덩이를 붙이고 잠깐의 쉴틈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손이 스마트폰으로 간다. 홀드 버튼을 눌러 화면을 키고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어김없이 친구추천 란에는 내가 알 수도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 올라왔다. ‘함께 아는 친구 몇 명’ 이라 적힌 문구와 함께. 함께 아는 친구가 스무 명 이상이면 물어볼 것도 없이 그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이 분명하다. 단지 그냥 '아는'사람이거나 친구추천을 걸만큼 친하지 않아 친구를 맺지 않았을 뿐.
낯익은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함께 아는 친구는 32명. 쉽게 볼 수 없어 한 번 들으면 기억하기 쉬운 그런 이름이었다. 나는 단박에 그녀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
그녀는 고등학교 동창생이다. 남녀공학이지만 반과 층을 달리하여 남녀를 철저히 구분 짓던 우리학교는, 학생들에게 미안했던 것인지 뭔지 그래도 일주일에 한 시간은 스포츠댄스 시간으로 두어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하였다. 그 수업에서 그녀는 나와 한 학기 간 서로의 파트너가 되었다. 엄마와 할머니를 제외하고 한 번도 여자와 손을 잡아보지 못했던 나는 여자와 손을 잡는다는 것이 그렇게도 떨렸는지 스포츠댄스 음악이 흘러나오기만 하면 그녀 앞에서 수전증 걸린 사람마냥 손을 달달달 떨어댔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내 손을 먼저 잡아주곤 날 보며 빙그시 웃어주었다. 그녀의 미소는 정말 예뻤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씨 또한 미소만큼이나 예뻤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친절했다.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스텝에 자신이 없었던 나에게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격려해주며 하나하나 천천히 동작을 다시 짚어주던 그녀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어느새 나는 일주일 중에서 그녀를 만나는 시간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녀는 그런 내 마음을 알고있었을까. 학기가 끝날 때 즈음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당시 소심했던 나는 고백은 커녕 말 한마디 조차 건네지 못했다. 손을 잡으면서 '안녕?' 하고 말을 붙여볼까, 아니면 수업이 끝날때 '수고했어.' 라고 말하며 자연스레 친해져볼까 하며 늘 그녀에게 할 말들을 생각해 두곤 했지만, 막상 그녀 앞에만 서면 바보같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였지만, 시간은 흘러 학기가 바뀌었고 파트너도 바뀌었다. 나는 나와 멀찍이 떨어져 다른 남자와 춤을 추고 있는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새로운 파트너의 발을 밟기 일쑤였고, 그 학기에도 결국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렇게 짝사랑으로 끝이 난 나의 첫사랑은 일단락되었다. 벌써 오래된 이야기다.
*
그녀는 추억을 되새기고 싶었던 것인지 대학시절로 보이는 앳된 얼굴을 프로필에 올려두었다. 고등학교시절 얼굴을 고대로 옮겨 놓은 듯 한 사진은 나를 다시금 설레게 만들었다. 최근 게시물이 없는 걸로 보아서 페이스북을 하지 않은지는 꽤나 오래된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녀에게 친구신청을 보냈다. 받아주던지 말던지. 고등학생의 나도 그녀에게 이렇게 친구신청을 할 수 있었더라면 참 좋았으련만.
목이 뻐근했다. 벌써 관절에 신경을 써야 할 나이가 온 걸까. 목을 왼쪽 오른쪽으로 젖혀가며 우둑우둑 소리를 내고 일어나 두 손을 머리 위로 뻗어 기지개를 크게 폈다. 오른쪽 손이 달아오른 스마트폰으로 후끈거린다. 땀으로 젖은 오른손을 바지춤에 문지르며 왼손으로는 충전기를 찾았다. 스마트폰에 충전기를 꽂은 후, '충전 중'이라 적힌 것을 확인하고 며칠 전 후배의 가구점에서 분위기에 떠밀려 구입해버린 모서리가 둥글고 얇은 탁자위에 올려두었다. [10시 40분] 모처럼의 이른 퇴근에 오늘은 오래간만에 집안청소도 하고 제대로 된 저녁을 해 먹을까 싶었지만, 기억의 서랍장 가장 높은 층에 놓여있던 오래된 추억들을 끄집어내어 보느라 시간 가는 줄 전혀 몰랐다. 제대로 된 저녁밥을 먹기는 이미 늦어보인다. 여유를 부리는게 아니었다. 그냥 대충 씻고 잠이나 자야겠다 싶어 수건과 갈아입을 속옷을 챙기고 있던 차에, 띠링- 하고 얇은 탁자 위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손에 쥐었던 속옷을 꺼내다 말고 얇은 탁자위의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그녀가 내 요청을 수락한것이다.. 그녀가 받아줄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나는, 그 알림문구를 보니 다시 고등학교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용기 내어 그녀의 담벼락에 글을 남겼다.
" 오랜만이야. 잘 지내고있지?
날 기억하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반갑다^^ "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결국 보내버렸다. 아무리 고쳐봐도 저 두줄에 남아있는 어색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다시 수건과 속옷을 챙겨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곧 그녀가 답장을 해 주었기를 바라면서 대충 씻은 젖은 얼굴을 급하게 수건으로 닦으며 화장실을 나와 다른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쥐어 페이스북을 열었다. 하지만 여전히 댓글은 달려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에도, 그 다음날 밤 까지도 그녀로 부터 온 알림은 더 이상 없었다.
그렇게 얼마 간 페이스북 알림목록에서 그녀의 이름을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짧은 진동과 함께 반가운 알림이 액정위로 비쳤다. 그녀가 내 글을 '좋아요' 한 것이다. '좋아요'라니. 나는 그녀가 당연히 댓글을 남겼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내심 그녀와 연락을 주고 받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를 품기도 했다. 댓글이 아닌 좋아요에 적잖이 실망했지만 '좋아요'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 후 그녀는 내가 올리는 다른 게시물에도 이따금 '좋아요'를 눌러주었다. 나는 그녀의 '좋아요'를 볼 때마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사소한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주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신나는 일이다. 그녀는 친구 아들놈 돌잔치에 갔다왔다는 글에도 '좋아요', 직장상사한테 엄청 까여 짜증나다는 글에도 '좋아요', 황금같은 연휴에 볼 만한 영화를 추천해 달라는 글에도 '좋아요'를 눌렀다. 그녀의 '좋아요'는 마치 어린시절 일기 검사를 맡을 때 일기장 아랫부분에 찍어주던 담임선생님의 참잘했어요 도장같았다. 참잘했어요 도장을 하나의 보상으로 생각하고 도장을 많이 찍어줄수록 일기를 열심히 써오는 어린 아이들처럼, 그녀의 '좋아요'가 보이면 보일수록 나는 더 열심히 게시물을 올렸다. 그렇게 내 게시물이 늘어갈수록 그녀의 '좋아요'도 함께 늘어났다. 그녀는 '좋아요'를 누르는것 외에 자신의 담벼락에 글을 남긴다던지, 댓글을 쓴다던지, 메시지를 보낸다던지 하는 다른 페이스북 활동은 전혀 하지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그녀가 더욱 궁금해졌다.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어디에 살고 있을지, 결혼은 했을지. 그렇게 그녀가 보고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켠에서 조금씩 자랐다.
*
퇴근길은 언제나 그렇듯 피곤하다. 시동을 끄고 어디하나가 결린듯한 찌뿌둥한 몸을 이끌며 아파트에 들어섰다. 평소와 다름없이 1024호라고 적힌 우편함에 손을 넣어 집이는 대로 꺼냈다. 댓개쯤 돼 보이는 봉투들. 그 우편물들을 한 손에 움켜쥔 채 엘레베이터 앞에서 멈췄다. 7층, 6층, 5층... 그동안 나는 가만히 서있기도 멋쩍어 오른손에 들려있던 봉투들을 살폈다. 청구서, 전단지, 또 다시 청구서, 그리고 또다시 전단지. 청구서와 전단지, 그리고 과외구함 같은 쓰잘데기 없는 종이쪼가리들이 반복되던 가운데, 그녀와 나의 재회를 도와줄지도 모를 평범한 종이봉투를 발견했다.
'○○고등학교 제 23회 졸업생 동문회'
*
생전 가본 적 없는 모임이라 굉장히 낯설었다. 동창회는 왁자지껄했다. 예상은 했지만 시끄러웠다. 회사 술자리도 많이 가져봤지만 이런 자리는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미지근한 공기 속에 술 냄새와 희뿌연 담배 연기가 가득 차올라있어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부터 찾았다. 학창시절, 그녀는 워낙 사교적이었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이런 모임에 꼭 참석할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내가 너무 일찍 온 탓일까. 아직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발견한 건지 저 멀리서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녀석 둘이 웬일로 이런 자리에 다 온거냐며 나를 반겨왔다. 그 중 한 놈이 내 팔을 잡아끌어 자기 옆자리에 앉히곤 맥주 두병과 안줏거리가 될 만한 것들을 시켰다. 나는 창을 바라보았다. 색색으로 번뜩이는 네온사인이 반사되어 눈이 아팠다. 그녀는 언제쯤 올까. 취기가 오르고 모두 그때 그 시절의 추억에 잠겨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즈음, 나는 그녀가 보이지 않아 오래된 기억을 더듬거려 그녀와 가장 친해 항상 붙어 다녔던 친구 하나를 찾았다. 그녀의 친구를 찾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굴은 거의 변함이 없었지만 자잘한 주름과 기미를 감추려는 두터운 화장과 나 아줌마요를 연신 외치듯한 손짓과 몸짓, 말씨 그리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그녀는 우악스러운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 동안의 시간을 무시 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는 제발 그렇게 변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들어보니 그녀의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결혼 해 아이 셋을 낳아 둘은 벌써 초등학교를 보내고, 지금은 보험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 실적이 엄청나다나 뭐라나. 나는 그 친구에게 슬며시 다가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만 보고 있었다. 따발총처럼 쏘아대는 그녀의 목소리가 잠시 주춤해 지며 그녀는 옆에 있던 물 한 컵을 전부 입안에 들이부었다. 그렇게 말을 했는데 목이 타지 않을리가 없지. 나는 이때다 싶어 그녀는 오지 않는거냐며 무심한 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 타이밍을 잘못 잡았는지, 아님 그 말을 꺼낸 것이 잘못이었는지, 그녀는 내 말을 듣자마자 눈썹까지 올라가있던 입꼬리를 뚝 떨어뜨리곤 이상하다는 듯이 날 한참이나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거야. 그 애가 실종 된지 벌써 몇 년이 지났어. 지금쯤이면 아마 사망처리가 되어있을걸,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거야?"
"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묻고 싶은 건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그 순간 거대한 쇳덩이가 내 머리를 강타하고 지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시끄럽던 공간을 한순간의 정적이 순식간에 메워버렸다.
"아유 참, 넌 오랜만에 얼굴 비쳐놓곤 왜 그런 얘길 꺼내고 그래.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우리 산 사람은 산 사람대로 즐겁게 놀고먹으면 되는 것이지. 안 그래 다들?“
순간의 어색한 침묵 속에서 누군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그래. 자자 얼른 마시자 마셔. 우리라도 재밌게 살아여혀. 다 같이 건배 한 번 더해!“
곧 원래의 분위기를 되찾아 이곳저곳에서는 위하여를 외쳐대며 서로의 잔을 부벼댔다. 하지만 잔과 잔이 만나 만들어진 쨍한 소리를 끝으로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 어떤것도 내 목구멍을 넘어가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그 자리를 즐길 수 없어 뛰쳐나오다시피 도망쳐 나왔다. 그녀가 실종되어 이미 몇 년전에 죽은 사람이었다니. 차라리 옆구리와 엉덩이에 살이 덕지덕지 박힌 애 셋 딸린 유부녀인 편이 천배 만배 나았다. 그렇담 그녀가 아니라면 그동안 내 게시물에 끊임없이 '좋아요'를 누른 것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머릿속이 하얘지고 도저히 정리가 되지 않아 아무런 생각 없이 앞에 놓인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그렇게 걷기만을 계속하는데, 스마트폰을 쥐고 있던 왼손에서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페이스북 알림이 와 있었다.
" 고등학교 동창회에 가는 중.
갑자기 친구들도, 담임선생님도, 학교도, 운동장도 그립구나."
라고 세 시간 전에 올린 게시물에 그녀가 또 '좋아요'를 눌렀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나는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곳을 계속 걷고있었다.도시의 밤공기는 얼어붙은듯 차가웠다. 나는 택시를 잡아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늘 하던 대로 부엌에 들어가 인스턴트커피를 하나 집어 뜯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라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머그잔에 커피를 남김없이 탈탈 털어 넣었다. 가죽소파에 앉아 커피 한 모금으로 입을 축였다. 쓰다. 하얗고 둥근 머그잔 속에는 까만 파도가 요동치고 있었다. 파도가 좀처럼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는 한 번밖에 입에 대지 못한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탁- 소리가 나면서 팔꿈치에 커피가 튀었다. 꽤나 묵직했던 머그잔에 나는 가볍게 손목을 돌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삼사일 동안 나는 몸에서 섬뜩함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
동창회에서 있었던 일은 이제 그럭저럭 아무렇지 않아가고 있었다. 나는 고작 그런 일로 몇 주 동안이나 생활에 지장이 생길만큼 약한 사람은 아니다. 아, 얼마 전 일이다. 나는 그녀의 계정이 누군가에 의해 해킹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혹여나 그것이 그녀의 실종사고와 관련이 있을까하고 더 깊게 알아보았다가, 허- 하는 헛웃음밖에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컴퓨터에 능하며 해킹보안 관련 일을 하고 있는 아는 인맥을 통해 알아본 결과, 그녀의 계정을 해킹한 것은 경기도 소재의 중학교에 재학 중인 삼학년 남학생이었다.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어 그를 추궁해 보았지만, 그는 페이스북 계정 여러 개로 해킹 연습을 시도 해 보았을 뿐, 불순한 의도로 그런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동안 왜 그녀의 계정에 접속 해 굳이 내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고 간 것이냐는 건데. 그의 답변은 참 기가 찼다. ‘그냥, 심심했어요.’ 랬다. 참으로 허탈했다. 어찌되었든 나는 그를 용서해 주기로 하였다. 용서 하지 않는다 해서 내가 그를 신고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내가 정신적으로 조금 놀라는 일이 있었긴 했지만, 그의 해킹으로 누군가가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더구나 해킹을 당한 사람은 이미 산 사람이 아닐 터이니. 그리고 그 날 나는 스마트폰에서 페이스북을 지웠다. 페이스북, 다신 열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며.
처음에는 내가 중삼 꼬맹이에게 농락을 당한건가 싶어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곧 여자를 만난지 오래된 상태에서 친구란 놈들은 죄다 장가를 가버리고,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으면 말 한번 해 보지 못한 14년 전 짝사랑이 누른 ‘좋아요’에 마음이 다 흔들렸을까 하고 불쌍한 내 자신을 스스로 한탄했다. 여자가 그리웠던 것이다. 나는 곧바로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소개팅과 맞선 자리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지금, 며칠 전 소개팅을 주선해 주겠다던 대학 선배에게서 내일 시간 어떠냐는 전화가 왔다. 형수님과 같은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초등학교 교사로, 나와는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인데다 아주 참하고 예쁘더랬다.
내일 오후 한 시. 강남역 11번 출구 앞 건물 9층 레스토랑.
나는 선배가 불러주는 대로 메모지에 적었다.
'키 162cm의 긴 생머리. 아이들을 좋아함. 취미는 보드타기.'
아직 만나보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좋은 예감이다. 나는 전화를 끊고 거울 앞에 서서 손으로 머리를 정돈했다. 소개팅은 대학 다닐 적에 해보고 해 본적이 없다. 오래간만의 소개팅에 나는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어떤 옷을 입고 나가야 하나 고민을 하다 최근에 산 체크무늬 셔츠와 넥타이를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어 옷장 손잡이에 걸어두고 침대 위에 누웠다. 창문을 열어놓았는지 커튼이 살랑이었다. 커튼을 만지고간 시원한 바람은 내 발가락도 간질였다. 이렇게 날씨 좋은 날에 얼굴도 모르는 그녀와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가득한 공원길을 걸을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잘 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기필코 올해 안에는 좋은 여자를 잡아 청첩장을 돌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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