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사과 깎는 법
[고1] 사과 깎는 법
2013.10.22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이렇게 모인것도 인연인데 우리 나중에 조원들끼리 따로 모여서 소풍이라도 갈까요? 재밌을거예요."
여자는 아까부터 뭐가 그리좋은지 혼자 싱글벙글 재잘거린다. 그러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상의 대꾸를 해준다.
"아 예. 뭐. 그러죠."
"저 여기 사과 좀 깎아주실래요? 저는 이 접시들을 마저 닦을게요."
여자가 내게 칼을 쥐어주며 말했다.
사과를 깎는법, 나는 그 방법을 누구에도 배워본 적이 없다. 이건 마치 고등학교를 갓 입학한 아이에게 적분 문제를 들이미는 격.
어쩔줄 몰라 사과와 그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기만을 반복했다.
여자가 드디어 내 시선을 알아챘다.
이제 내가 사과 깎는 법을 모른다는걸 알고, 사과 잡는 방법부터 하나씩 알려주기 시작하겠지.
나는 속으로 기쁨의 환호를 내질렀다.
모르는 것을 배운다는 것, 그것은 지적수준이 한 단계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자는 내 눈빛의 의중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왜...왜요? 뭐 문제있나요?"
모른다는것을 입 밖으로 꺼내놓는 건 정말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가 없다. 그래도 용기내어 말했다. 그것도 아주 정중히.
"저는 아직 사과깎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제 정말 그녀가 내게 사과깎는 법을 전수해 줄 차례이다. 그런데 여자가 웃는다. 그 웃음은 사과깎는 법을 모르는 나를 이해한다는 미소도 아니었고, 자신의 비법을 전수해줄 사람이 생겼다는 기쁨의 의미도 아니었다. 폭소. 그것은 폭소였다. 그것도 조롱과 멸시가 가득 섞인 폭소.
"네? 뭐라구요? 배워보질 못했다고요? 하하하하"
여자는 그녀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데시벨을 높여 웃어제꼈다. 숨 넘어가기 일보직전이다.
"민경씨, 왜 그래. 무슨일이야?"
나머지 두 조원이 그녀가 내지르는 데시벨에 놀라 달려온다. 아마도 내가 여자 앞에서 어떤 개인기라도 펼쳤겠거니 하고 생각했을테지.
나는 단지 사과 깎는 법을 배운 적 없다고 고백했을 뿐이다.
"사..사과 깎는 크큭 법을 아..직 크크큭 배우지 못하셨대요 하하하하하하."
여자는 웃음을 참느라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나머지 두 조원은 여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벙벙한 채로 서있다 내 손에 들린 사과를 보고 이내 그녀의 폭소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킬킬거리는 그들의 목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수치스러웠다. 그들에겐 어떻게 들렸을지 몰라도 나는 용기내어 그들에게 무지를 고백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내 수치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들도 깨닫게 해 주고 싶었다.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를.
그들은 나의 무지를 비웃었다. 나도 아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살인. 살인을 배워본 자는 극히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 법을 알고있다는 걸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제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그것을 그들에게 보여줄 차례이다. 그들은 내 지식수준을 보고 감탄할 것이 분명하다.
하나, 둘, 셋. 세 명. 그들로 치면 사과 세게를 깎는 셈일 터.
기본에 충실했다. 칼로 찌르는 깊이부터 흔적을 인멸하는 것까지 빈틈없이 정확하게.
토막을 낸다던가 시체를 묻는다던가의 일 따위는 하지않는다. 어차피 그것은 사과를 다 깎고 나서 차원의 문제였다. 몇 등분을 할 것인가, 그릇에 배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같은 부수적인 것들.
정석대로, FM대로. 나는 한 번 배운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게 사과를 깎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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